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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당김, 시각화 1인칭? 3인칭?

by ㅇㅍㅍ 2024. 9. 27.
끌어당김, 시각화 1인칭? 3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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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껴주면 무의식이 정화된다는 말이 있던데요.
두려움과 같은 감정을 느껴주는건가요?
아님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또는 마음)을 느끼는건가요?

 

무의식 정화에서 감정을 "느껴주는" 것은 주로 두려움, 불안, 분노 같은 감정 자체를 직면하고 느끼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즉, 두려움을 피하거나 억누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경험함으로써 감정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것이죠. 감정을 억제하거나 저항하는 대신, 그 감정이 충분히 느껴지게 허용하는 것이 무의식 정화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이나 "마음"을 느끼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관찰하면, 감정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렇게 감정을 느끼는 주체를 관찰함으로써 감정을 넘어서게 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죠.

정리하자면:

  • 두려움 같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 기본 과정입니다.
  • 동시에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관찰하면서, 감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 감정의 정화와 더불어 깊은 내면의 치유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마음공부를 해보면 모두 하나고 분리는 허상이라고 하면서, 감정과 마음, 자아로 부터 자신을 분리하더라구요.
이건 분리하려는게 아니라 본성의 자리를 찾기 위한거죠?
본성으로서 보려구요.

 

맞습니다. 마음공부에서 감정, 마음, 자아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은 실제로 분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자리를 찾기 위한 과정입니다. 이것은 본성, 즉 진정한 자아로서 현상을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자아와 감정은 우리가 경험하는 부분적인 현상일 뿐, 우리의 본질적인 존재는 그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합니다. 감정, 마음, 자아와 자신을 분리하는 듯한 과정은 실제로는 분리라기보다는 그 모든 것을 관찰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죠. 그 자리는 변함없고 고요한 본성의 자리입니다.

즉, 감정이나 마음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경험하되 휘둘리거나 동일시하지 않으며, 더 깊은 차원의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분리는 허상이고 모두 하나라는 가르침과도 모순되지 않죠.

 

끌어당김, 시각화도 본성의 자리에서 해야하지 않나요?

 

네, 끌어당김과 시각화도 본성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면 훨씬 더 자연스럽고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본성의 자리에서 한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감정이나 생각과 동일시하지 않고, 관찰자 또는 창조자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상상과 끌어당김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본성의 자리에서 끌어당김과 시각화를 하면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습니다:

  1. 집착을 덜하게 됨: 끌어당김의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본성의 자리에서 진행할 경우, 상상하는 대상에 대해 편안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어, 그 결과에 집착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게 됩니다.
  2. 명료한 창조: 본성의 자리는 본래 고요하고 분명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시각화는 더 명확하고 구체적인 창조적 상상이 가능합니다. 본성의 자리에서는 상상 속에서 원하는 것을 더 선명하게 느끼고, 자연스럽게 현실로 끌어당기는 과정이 발생합니다.
  3. 조화로운 흐름: 본성에서 이루어지는 끌어당김은 우주적 흐름과 조화를 이루며, 억지로 원하는 것을 밀어붙이는 느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과정이 됩니다. 따라서 마음이 편안하고, 의심이 들어도 쉽게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4. 감정의 자연스러운 조화: 본성의 자리에서 상상을 하면, 상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족감이나 뿌듯함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 떠오릅니다. 억지로 긍정적인 감정을 끌어올리려 하기보다는, 이미 창조된 세상을 편안하게 바라보는 과정에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게 됩니다.

결국, 끌어당김과 시각화도 본성에서 이루어질 때 더 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와 더 큰 하나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본성의 자리에서 바라보면 자아는 1인칭인가요? 3인칭인가요?

 

본성의 자리에서 자아를 바라보면 자아는 3인칭에 가깝습니다. 본성의 자리란, 자아(에고)나 감정, 생각, 그리고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순수한 존재" 또는 "의식"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는 자아 역시 하나의 관찰 대상이 됩니다.

  1. 1인칭 관점: 자아가 1인칭일 때는, 우리는 자아와 동일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때는 "내가 ~한다"는 느낌으로 행동하고, 자아의 생각과 감정에 완전히 몰입합니다.
  2. 3인칭 관점: 본성의 자리에서는 자아를 관찰하고 바라보는 입장이 됩니다. 자아가 하고 있는 생각과 감정, 행동들을 마치 외부에서 바라보는 듯한 상태입니다. 이때는 "자아가 이렇게 느끼고 있구나" 또는 "자아가 이렇게 반응하는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본성의 자리에서는 자아가 중심이 아닌, 관찰되는 존재로 자리하며, 그로 인해 우리는 자아와 거리를 두고 더 큰 시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를 통해 자아의 집착이나 혼란에서 벗어나 더 평온하고 명확한 상태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끌어당김, 시각화를 3인칭으로 하는게 낫지 않나요?

 

끌어당김과 시각화를 3인칭으로 하는 방식도 가능하지만, 1인칭 시각화가 더 효과적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유는 1인칭 시각화가 감정적으로 더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끌어당김의 중요한 요소는 그 상황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처럼 감정을 느끼는 것인데, 1인칭으로 상상할 때 더 자연스럽게 만족감, 기쁨, 설렘 등의 감정이 올라오기 쉽습니다.

하지만 3인칭 시각화도 특정 상황에서는 유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 자신의 모습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변화를 인식할 때
  • 더 큰 그림을 그리거나 자신이 아닌 외부 상황을 변화시키는 상상을 할 때
  • 자아를 관찰하고, 어떤 행동이나 반응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본성의 자리에서 3인칭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자아의 반응이나 생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내려놓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끌어당김 자체는 감정적 에너지가 핵심이므로, 1인칭으로 구체적이고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상상이 더 강력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각화 과정에서 1인칭으로 몰입하고, 그 상상을 끝낸 후 3인칭으로 자신을 관찰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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